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년)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년)에 신라(新羅)로 하였으며,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시조탄강(始祖誕降)
인류가 도구를 발명하고 역사를 창조한 이래, 인간의 행위를 처음에는 신(神)이 하셨다하였고, 차츰 인지가 계발되면서 인간이 한 일을 초인적 인간의 행위로 설명하였으며, 그 이후부터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한 그대로 인류사는 기록했다. 이를 통털어 신격화시대, 초인격화시대, 인간 역사의 시대순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우리 민족사에서는 단군시대나 고대의 건국되던 일들은 건국신화로 신성시 했다. 신라 박혁거세는 백마의 알에서 탄생하였고, 석탈해는 까치의 보호아래 뗏목속에서 나왔는데, 경주김씨 시조는 금궤속에서 축복을 받으며 탄강하였으니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3대 석탈해왕 9년(AD65년) 3월(삼국유사에는 AD60년 8월로 기록됨)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본즉 큰 빛이 숲속에서 나왔는데 자색구름은 하늘에서 땅에 내리비치었고, 구름속에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어 그 빛이 금궤에서 나왔으며 나무밑에서는 흰 닭이 울더라 함으로 왕은 행차하시어 금궤를 열어본 즉 사내아이가 누워있다가 일어나는데 그 자용(姿容)이 기위(奇偉)했다. 왕은 기뻐하며 "이는 후사가 없는 나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왕자가 아니겠는가?"하고 안고 어가를 타고 궁궐로 오는데 이때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서 날뛰었다. 왕은 애기를 궁중에서 키우며 혁거세(赫居世)처럼 밝고 지혜로워 알지(閼智)라고 이름지으니 알지란 우리말의 '아지'란 칭호였다. 왕은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하고 대보공(大輔公)으로 삼았고, 파사왕(婆娑王)의 뒤를 잇게하였으나 김알지는 사양하여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씨라하고 또 시림을 고치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여 국호로 삼았다. 그리고 알지공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아도는 수류(首留)를, 수류는 욱보(郁甫)를,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아 이어졌는데 구도는 신라김씨 1대왕인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이다."
이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 각각 조금씩 다른점이 있으니 두 문헌을 종합해서 옮겼다. 이 설화에서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는 오색 찬란한 축복속에서 탄생하되 왕위를 사양한 겸양의 미덕을 은축하신 시조로 탄강하여 장차 김씨 왕이 겸양과 애민의 왕업과 서광을 보이는 설화로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계림세묘(鷄林世廟 경주 황남동)에 모시고 춘분에 제향하고, 유적으로 계림유허비와 비각(사적 19호)이 경주시 교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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